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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이후, 산불이 남기고 간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약속

영남연합포커스 김진우 기자 

 

3월 이후, 산은 한순간에 침묵했다.
검게 그을린 능선과 타다 남은 나무 기둥들은 말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불길은 지나갔지만, 상실은 남았고, 회복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산불은 자연만 태운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과 일상의 안온함,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마음 한켠까지 함께 스쳐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 땅은 늘 상처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을.
잿더미 위에서도 새순은 올라왔고, 절망의 끝에서 다시 길을 만들어온 것이 지역의 역사였다. 산불 이후의 자리는 단지 피해의 기록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불길이 지나간 산자락을 다시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적막’이었다. 한때 바람에 흔들리던 숲은 멈춰 있었고, 새소리는 낮아졌다. 하지만 그 침묵은 끝이 아니었다. 조금만 시간을 두고 바라보면, 검은 흙 사이로 연둣빛 생명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자연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또한 그래야 한다.
 

이번 산불은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결코 전능하지 않으며, 대비 없는 안일함은 언제든 큰 대가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위기 속에서 드러난 연대의 힘도 분명했다. 밤낮없이 현장을 지킨 이들, 묵묵히 지원에 나선 주민들, 이름 없이 땀 흘린 수많은 손길이 있었기에 피해는 더 커지지 않았다. 산불이 남긴 자리에는 아픔과 함께, 공동체의 저력도 함께 남아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복구는 단순히 원상회복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전보다 더 안전하게, 더 지속가능하게, 그리고 더 단단한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숲을 다시 심는 일은 단순한 조림이 아니라, 미래를 심는 일이다. 마을을 정비하는 일은 공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여기에 행정의 책임과 주민의 참여, 그리고 지역 전체의 공감이 함께해야 한다.
꽃은 한 번에 피지 않는다.

 

잿빛 땅이 충분히 숨을 고르고, 비와 햇살이 반복된 뒤에야 비로소 꽃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의 지역도 그러하다. 급하게 결과를 재촉하기보다,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회복의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탓하기보다, 서로를 다독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꽃으로 피어나라.”
이 말은 단순한 희망의 구호가 아니다.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겠다는 다짐이며, 다시 일어서겠다는 공동의 선언이다. 자연이 그러했듯, 지역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새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다.
2025년은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겼다.

 

산불은 그중 가장 무거운 기억으로 남겠지만, 동시에 가장 분명한 교훈이기도 하다. 위기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지만, 준비된 지역은 흔들리지 않는다. 안전에 대한 인식, 환경에 대한 존중,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일상 속에 뿌리내릴 때, 우리는 다음 위기를 ‘재난’이 아닌 ‘관리 가능한 사건’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시선은 2026년을 향한다.
희망은 막연한 기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늘의 반성과 실천에서 비롯된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잿더미 위에 체념을 둘 것인가, 아니면 씨앗을 심을 것인가. 그 선택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2025년을 보내며, 우리는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아픔을 잊자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의미다.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고칠 것은 고치며, 감사할 것은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해를 맞을 자격이 생긴다. 지역은 늘 그렇게 성장해왔다.
산불이 남기고 간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그곳에는 교훈이 있고, 연대가 있으며, 다시 피어날 가능성이 있다. 꽃은 반드시 핀다. 다만 그 꽃이 더 오래, 더 강하게 피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
2026년을 희망의 해로 만들기 위해,
2025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다시 약속한다.
상처를 외면하지 않되, 상처에 머물지 않겠다고.
잿빛 기억 위에, 다시 한 번 꽃을 피워내겠다고.
이 땅은 그렇게 다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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